Ⅰ. 들어가며
한자는 전통적으로 형, 음, 의로 구성된다고 일컬어진다. 일본어학에서는 이 가운데 한자의 형(形) 을 분석할 때에 서체(書體), 자체(字體), 자형(字形)과 같은 구분을 세우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1). 예를 들어 서체라는 용어는 해서, 행서, 초서 등을 가리키며, 자체는 개개의 글자가 존립하는 것과 상 관되는 것이다2). 그것들을 어떻게 파악할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차이가 있어서 鳩野(2011, 2017a, b)가 정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식이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종종 일본어학에만 존 재하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물론 한자의 모양에 대한 흥미와 관심은 일본어학에 국한되거나 시작된 것이 아니며 중국에서의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일본어학에서 복잡한 개념으로 파악하는 계기가 된 것에는 石塚(1999) 가 지적한 한자 자체의 일본적 표준이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상세히 후술하기로 하고 간략히만 언급하 자면, 중국의 표준적 문자는 당나라 시절에 변용이 있었고, 일본에는 그것의 옛 형태가 전해져서 보존 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동요로 인해서 일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의 국어문자개혁[國 字改革]에서도 완전한 문자 통일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을 낳았고 한자 자체(字體) 문제의 정리를 위 한 여러 방안이 만들어졌다.
그 가운데 石塚(1999)는 서체, 자체, 자형이 세 층위를 이루는 것으로 간주하고 서체 안에서 자체 를 인정하고 있는데, 그러한 서체 개념은 제가의 공감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石塚(1999) 에 제시된 서체 개념에 문제가 있다기 보다는, 어떠한 부분에서 서체라는 개념을 도출해 내는지가 문 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石塚(1999)의 세 층위 구조는 한자 자체 표준의 변천을 파악하는 모델로서 지금까지 주목되어 왔 다. 그러나 서체라는 문제를 다루지 않고서는 그것의 의의는 충분히 정리할 수 없을 것이다. 본고에서 는 이시즈카 한자자체론에 대한 검토를 통해 서체라는 개념에서 한자에 대한 어떠한 이해를 얻을 수 있는지를 논의하고자 한다.
Ⅱ. 이시즈카 한자자체론의 발전
1. 이시즈카 한자자체론의 정의
이시즈카 한자자체론은 石塚(1984: 11)에서 처음 제시된 것으로 아래와 같이 간결한 정의가 제시 되었다.
서체(書體)—한자의 모양(形)에 있어서 존재하는 사회 공통의 양식. 대개는 그 한자 자료의 목적에 따라 결정된다. 해서, 초서 등.
자체(字體)—서체 안에서 존재하는 개개의 한자에 대한 사회 공통의 기준.
자형(字形)—자체 안에서 인식하는 개개의 한자가 서사된 모양 그 자체.
후에 ‘자종(字種)’이라는 개념이 추가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 1984년 의 정의를 이시즈카 한자자체론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것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정의를 영어로 번역 한 Ishizuka (1987 (1999): 258, emphasis original)에 제시된 번역도 참조한다.
書体… Common form of the type of a character. In many instances, the usage of a particular type is determined by the purpose of the writing. 楷書, 草書 etc.
字体… Common standard of a particular character existing within the 書体.
字形… Shape itself of a particular character as recognized within the standard of the 字体.
또한 일본어 이외의 언어로 된 이시즈카 선생에 의한 이시즈카 한자자체론 소개 문헌은 아래와 같다3).
Ishizuka, Harumichi (2009?). Current status and future prospects of the Hanzi Normative Glyphs (HNG) Database. IDP Papers.
石塚晴通(2004), 「關於漢字文化圈漢字字體的標準」, 『敦煌学』 25.
石塚晴通(2013), 「漢字字體規範史에서 바라본 『龍龕手鏡』 」, 『구결연구』 30.
2. 이시즈카 한자자체론의 착상
우선 이시즈카 한자자체론의 착상에 대해서 이시즈카 하루미치 선생의 담화를 바탕으로 정리해 두고자 한다. 선생의 말에 따르면 이 자체론은 오랫동안 품어온 개념이며, 石塚(1984)에서 도서료본 (圖書寮本)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자체를 제시할 때에 문장으로 풀어낸 것이었다고 한다. 도서료본 일본서기에 드러난 자체 표준의 양상은 그것의 성립 배경과 잘 호응했기 때문에 조사 결과를 해당 논고를 통해 제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서기 고사본은 정사(正史)이기 때문에 대충 필사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필사자가 일본서기를 어떻게 대했는지에 따라 다양한 필사본이 만들어졌다. 가령 이와사키본(岩崎本) 은 수준 높은 학습을 위한 사본이었던 반면, 가네카타본(兼方本)은 우라베 노 가네카타(卜部兼方)가 신토(神道)를 관장하는 자기 가문의 지위를 높이고 조정에서 강독할 때에도 사용할 수 있게 만든 공적 인 성격을 가진 필사본이었다4).
그러한 개개의 문헌이 갖는 성격의 차이가 본문, 사용된 종이, 전래 등을 통해 드러나며, 나아가서 는 공적인 것에는 그 지역과 시대의 자체 표준이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5)6). 실제로 위의 정의에 덧붙인 설명에서 간록자서(干祿字書)를 인용하는 등 딱히 일본서기의 해당 필사본에만 얽매여 설명하 고 있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일본서기에 대한 이야기로 상정하면 너무나 동떨어진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서기가 정성껏 필사되어야 할 문헌이었으며 사실로서 전래된 문헌들도 그 러하다는 파악 위에서7), 일본에서 그에 걸맞는 자체는 무엇이었는지가 문제가 되어 간록자서와의 대 비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시즈카 선생의 연구는 石塚(1967, 1970) 이후 일본 훈점어학의 학통 안에서 문헌의 성립과 그것 의 독해(훈독)이라는 행위의 역사에 대해 연구한 것이었다. 또한 넓게는 동양이라는 관점에서, 돈황 문헌을 비롯한 중국 서방사 연구로 저명한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의 후지에다 아키라(藤枝晃) 선생 에게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는 특징이 있다. 훈점어학에서도 철저한 실물 조사로 유명한 도쿄대학의 쓰키시마 히로시(築島裕)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리고 이시즈카 선생이 돈황학을 배운 후지 에다 선생은 돈황 자료의 연구가 종종 진기한 대상만 찾는 ‘보물찾기’에 빠지기 쉬움을 비판하고 단순 나열을 뛰어넘은 총체적 이해를 강하게 부르짖으며 스스로 실천한 인물이었다8).
이시즈카 한자자체론은 그러한 후지에다 선생이 제시한 코디콜로지(藤枝, 1982)라는 개념을 바탕 으로 하고 있다9). 이시즈카 선생은 이후 이러한 이시즈카 한자자체론을 바탕으로 Ishizuka(1987) 등을 통해 한자자체론과 코디콜로지에 대한 생각을 심화시켜 간다. 이것을 위해 정비가 진행된 것이 이른바 이시즈카 한자 자체자료이며 HNG라는 약칭으로 알려진 한자자체 규범사 데이터베이스(Hanzi Normative Glyph Database)였다10). 石塚(2012b: 1)에서HNG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한자의 자체에는 시대, 지역(국가)에 따른 표준이 존재하며 그 표준은 시대와 지역(국가)에 따라 변천한 다. 즉 범 시대적, 범 지역적인 정자(正字)나 속자(俗字)와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때때로 그러 한 사전 혹은 자전의 설명이나 언급을 접하게 되어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대상을 해서체로 한정하 여 위에 제시한 것을 보이는 작업을 30년 동안 계속해 왔다.
이러한 HNG를 바탕으로 石塚 외 (2011), 石塚(2012c, 2020, 2021), Ishizuka (2013) 등을 통해 서지적인 특징, 본문, 서체와 자체 등의 종합적인 맞춤새를 통해 그 문헌이 정제된 정도가 드러난다는 이시즈카 선생의 코디콜로지로 발전하게 된다11). 본고에서는 코디콜로지에 대해 상세히 논급할 여유 는 없으나, 자료의 이해와 이시즈카 한자자체론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을 강조해 두고 싶다.
3. 이시즈카 한자자체론의 이해
이시즈카 한자자체론의 각 층위에 대해서 하나씩 검토해 가고자 한다. 또한 이시즈카 한자자체론 의 자체에 대한 설명은 高田(2013), 池田(2016), 石塚・高田(2016)에서도 시도된 바 있다. 특히 高田 (2013)과 石塚・高田(2016)은 문헌과 자체의 관계에 대해서 상세히 다루었으며, 池田(2016)은 학설사 적인 검토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본고의 대상이 되는 서체에 대해서는 이들 선행연구에서는 해 서체 문헌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심층적인 검토는 이루어지지 않 았다. 그러므로 자체, 자형에 대해서는 이들 선행연구에 양보하고 간략하게 서술하기로 한다.
1) ‘서체’
먼저 ‘서체’는 영어 번역에서 “common form”이라고 된 것에 서 알 수 있듯이 글자를 적는 모양을 규정하는 것으로서 위치를 규정하게 된다12). 紅林(2012: 60)에 서술된 바와 같이 서체는 “사 용 목적이나 필사 재료의 차이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때로는 우연 히 생겨나서 양식화된 것”이며 “필사 목적에 맞춰 초서화 등에 따 른 점획의 연속, 생략, 필순 변화가 일어나며, 흘려 적지 않는 진서 (眞書)의 자형에 비해서 행초서로 적었을 때 자형이 변화”하는 것 은 “그것은 서법의 차이”이기 때문이다13). 예를 들어 會・会, 盡・ 尽 등은 현재는 해서체 자체 상의 차이이지만, 본래 이들은 서체를 넘어서는 섞이지 않아야 할 것들이었다14). 물론 解・觧、來・来와 같이 개성석경(開成石經)의 자원주 의에 따라 무리하게 복고적인 자체로 되돌려진 것은 이러한 사례에 해당하지 않는다15).
이러한 관점은 이시즈카 한자자체론에서 후지에다 코디콜로지의 성과 중 하나를 일반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池田, 2016: 204-206). 藤枝(1959, 1960, 1962a, 1962b, 1966, 1968)와 같은 일련의 연구들은 Fujieda (1966-70), 藤枝(1972, 1977, 1981)에서 결실을 맺는 서풍 변화를 돈황문헌의 종합적 조 사를 통해 밝힌 것인데, 가령 藤枝(1962a)에서는 붓16)이나 종이17)의 변화로 인해 예서(隷書)풍 의 서풍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해서가 완성에 이르렀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서법의 변화는 자체에 변화를 가져왔고 이것이 다시 새로운 서체의 양식화를 낳기도 한다18).
여기에서는 大西(2009a: 4)에 제시된 것처럼 서체가 “어떤 하나의 체계로서 문자에 대한 디자인” 이라는 관점은 취하지 않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디자인적 관점으로 읽으면19) 정의에 뒤이어 서술된 “그 한자 자료의 목적에 따라 결정된다.”(石塚, 1984: 11)고 언급된 것은 마치 문헌마다 서체 를 통일해서 서사하는 것을 의도했던 것처럼 독해될 수 있을 것이다20). 그렇지만 石塚・小助川(2015: 109)에서 “서체는 기본적으로 해서체이지만 일부 행서체가 섞여 있고(故, 事 등), 이러한 점에서도 돈황본 예기정의(禮記正義)가 일관되게 해서체로 필사되었던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고 언급한 것 처럼 서체는 개개의 글자마다 정해지는 것이다. 서체를 통일해서 필사하는 것을 포함하여 문헌의 성질 을 나타내는 것임을 이 인용문에서는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그 한자자료의 목적”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Fujieda (1966–70: Vol. 9, pp. 16–32)에서 목적에 상응하는 자료의 형태를 설명한 것과 같을 것이다. 불경이나 상급자와 주고 받은 문서 등은 격식을 갖춘 것이며, 그 이외에는 격식에서 어떤 형태로든 벗어난 양식을 취한다. 현대 에도 학위기나 의사 면허 등 특별한 면허증에는 그에 상응하는 형태21)나 서체 선택22), 글자 크기와 배열 선택23)이 이루어진다. 그러한 형태적인 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그것의 목적을 간파할 수 있는 것 처럼 어떠한 종류의 목적을 지닌 문헌은 서체를 그 양식의 일부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24). 이것은 시황 제의 서체 통일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25). 물론 그것이 언제나 철저히 이루어져 왔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에 맞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이해를 위한 보충으로서 풀이되어야 할 표현일 것이다.
이시즈카 한자자체론에서 서체란 앞선 단락에서 언급한 것이 주된 것이며, 어떤 글자를 어떻게 적 는다고 했을 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石塚(1984) 이후 오로지 해서체 문헌에서의 양식이 논의되어 오기는 했지만 石塚 외 (2018), 石塚・李(2018), 石塚(2018)에서 행서와 초서체 자료 에 대해서도 해서와 마찬가지로 표준적 문헌을 찾아내어 서체에서의 자체 표준 성립을 보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26). 뒤에 논하는 내용과 중복되지만 만약 행초서에서 자체 표준이 없다고 한다며 행초서는 서사방식에 일정할 수 없거니와 서로 이해 가능하지도 않을 것인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어떤 문헌 내에서 문자의 서사 방식이 일정하지 않다 하더라도 갑자 기 서체 개념을 내팽개치는 것이 아니라 우선은 石塚・小助川(2015)에서처럼 서체의 혼용이라고 파악 해야 할 것이다27).
2) ‘자체’와 ‘자형’
‘자체’는 특정 글자를 어떻게 적을 것인가에 관한 사회적 표준에 대한 공통된 이해를 가리킨다. 여기서 말하는 ‘표준’은 누군가가 명확히 규정해 놓은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언어도 개인 의 능력인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에 의사소통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 친구들끼리 쓰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사회적 표준인 표현을 쓰면 정중한 표현이 된다.
한자의 서체는 서법의 변혁에 의해 발흥했기 때문에 자연히 새로운 서체의 자체는 선행된 서체 변혁의 방향에 따라 여러가지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그 지점에서 ‘이체자’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시즈 카 한자자체론에서는 나중에 사회별 시대별 표준을 가정하기에 이르는데 石塚(1984)의 단계에서도 간록자서라는 규범을 근거로 일본서기의 자체를 논단하거나 하지는 않았으며 石塚(1999)에서는 그것 을 명확히 하여 복수의 자체 가운데 용례가 적은 쪽을 가리킨다는 정의가 부여되었다.
자체에서도 언어 일반과 마찬가지로 표준 형식에 맞추려고 힘쓴다면 그것은 공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어떤 예행 연습과 같은 것이 아니라면 이면지에 한 획 한 획을 집중해서 글자를 적는 일은 드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시즈카 한자자체론에서의 ‘표준’에는 단순한 공통의식 이상의 함의가 있다28). 자체의 표준은 당나라 초기까지는 가급적 여러 자체들 사이에서 동요되지 않고 적는 것이었던 듯 보이지만 중당(中唐) 이후에는 근거가 있는 자체가 권위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 石塚 외(2005)가 지적한 바와 같다.
자형은 자체가 구체적으로 발현된 형태를 가리키며 자체가 같은 것이라면 자형 상의 차이로 간주 된다. 물론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며 그 범위가 어떠한 것인지는 객관적으로 제시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른바 자체 인정 기준이란 자형의 변이 가운데 무엇을 우연적인 것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石塚・高田(2016: 357–358)에 이미 충분히 서술되어 있기는 하지만 ‘표준’과 ‘규범’의 차이에 대 해서도 간단히 언급해 두기로 한다. 표준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결과라면 규범은 표준이 그렇게 되도 록 만드는 행위로 이해된다. 따라서 石塚 외(2005)에서 개성석경(開成石經)의 자체에 이체자가 극히 적고 자체 표준이 잘 다듬어져 있는 것은, 규범을 세워서29) 그것을 표준으로 수용하여 적음으로써 달 성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 ‘자종’
‘자종’에 대해서도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자종이라는 개념은 원래 이시즈카 한자자체론에는 존재 하지 않았다. 이것은 岡墻・斎木(2007: 136)에서 추가된 개념으로서 아래와 같이 정의된다.
자종(字種): 사회 통념상 동일한 것으로 인식되며 일반적으로 음훈과 의미가 공통되는 상호 교환 가능한 한자자체의 총합
예를 들어 岡墻・石塚・斎木(2008: 71)에서는 学・學・斈 등은 동일하게《學》이라는 자종을 구성 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石塚(2012b: 2)에서 ‘편의’라는 한 마디를 동반하고 있듯이 이시즈카 한자자체론 안에서 이질적인 존재로서 위치한다. 사실 이것은 이시즈카 선생의 발상이라기보다는 HNG 작업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던 오카가키 히로타카(岡墻裕剛) 씨의 제안으로 HNG 작업 상의 단위로서 임의로 설정한 것이라고 한다.
이시즈카 선생의 담화에서는 자종을 이시즈카 한자자체론에 편입시키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고 하 는데, 필자 역시 자종은 어디까지나 이시즈카 한자자체론 외부에 있는 개념이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종이라는 개념이 한자에 대한 범시대적 이해의 산물일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즉 이시즈카 한자자체론은 하나하나의 문헌을 기준으로 설정된 모델인데 반해, 자종은 각종 문헌 속의 자체표준을 집적해 놓은 HNG 안에서 작업 상의 단위이며, 복수의 문헌이 필연적으로 묶여 버리므로 서로 교환되 어 쓰인 바 없는 두 개의 자체를 포함할 가능성이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가령 岡墻・石塚・斎木 (2008: 71)에 도표로 나타낸 学・學・斈 등을 모두 이체자로 지닌 문헌은 현행 HNG에는 존재하지 않는다30). 지금 열거한 세 글자는 하나의 선행 자체로부터 변이된 관계는 아니기 때문에 이체자로 인식 하려면 학습이 필요하다. 그것들을 종합한 자종이라는 집합 개념이 어떻게 성립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개개인의 뇌리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자서에 집적하거나 해서 문헌, 시대, 지역을 뛰어넘어서 한자를 동일시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31). 岡田(2022: 299-309)에서 이체 가나(仮名)의 사례를 들어 논한 것과 같이 공시적으로는 이체자는 집합으로서 존재한다기 보다 는 개개로 단립 가능한 것들이 용법 상의 유사한 분포를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질적인 동일성을 시사하는 집합이라는 관점으로 논의하게 되면 学・學・斈의 예와 같이 분포적으로는 연결되 지 않는 것조차 연결시켜 버리고 마는 것이다.
물론 자종이라는 개념은 자체 정리를 위해 사용이 불가피한 면이 있다. 하지만 자종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면 갑골문자에서 현대 서체까지 시대를 초월하여 취급한다는 점에서 난처한 개념이라서 개념 이용에는 주의를 요한다32).
Ⅲ. 이시즈카 한자자체론에서의 ‘서체’ 개념의 범위
1. ‘서체’ 개념이 유효한 범위
石塚(1984)에서 이시즈카 한자자체론이 제시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菊地(2022: 22)가 해서에 밖 에 해당하지 않을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시사하였다.
도서료본 일본서기에는 권마다 필사자가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자획을 크게 허물어뜨리지 않고 적은 것으 로 보이며 각 권은 통일된 필치로 필사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후술하는 바와 같이 동일 문헌 내에서 필치가 크게 바뀌는 문헌이 존재하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 정의가 모든 한자자체사적 현상, 모든 문헌에 적용되어도 좋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
이러한 언급을 하고서 약자체(略字體)라는 菊地(2022)의 주된 대상이 되는 개념에 대한 검토에서 ‘서체’라는 개념이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한다(30-33쪽)33).
이시즈카 한자자체론은 표준적 문헌의 탐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점획을 허물어뜨리지 않고 명확하게 적는’(菊池, 2022: 14) 문헌만을 다루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菊池(2022)의 논의는 본고의 논의와는 어긋남이 있지만 해당 논고에서 이시즈카 한자자체론 관련 문헌으로서 언급한 것이 藤枝(1981), 石塚(1984), 石塚 외(2005), 岡墻・石塚・斎木(2008), 石塚(2012b)에 한정된 것을 보았 을 때, 포괄적인 검토로 접근하는 본고와는 입각한 위치가 다르다 할 수 있다.
菊池(2022)가 지닌 이시즈카 한자자체론에 대한 오해에 대해서는 깊이 거론하지 않겠으나, 한자자 체사적 현상에 얼마나 적용할 수 있는 개념인지는 관심이 가는 부분이다. 이시즈카 한자자체론에서 서체 개념이 왜 필요한지는 이미 충분히 설명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체 개념의 유효성이 증명되었 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또한 유효성이 증명되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렇게 판단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용어에 대한 문제로서 무시할 수 없다.
여기서 떠오르는 것이 鳩野(2011: 159–160)가 정리한 인쇄 서체로서의 서체 개념이다. 인쇄 서체 에서는 이미 성립된 서체를 격식에 맞춰 교체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공업적 합리 화에 대한 관심도 또한 높아서 자체의 안정화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그러한 배경에서 특정 서체에 의거해서 자체를 정리하게 되고 범서체적 자종 개념이 도입된다34). 이것은 아래 山田(1976: 401)의 지적과 같이 “병렬하는 양식들”의 전형일 것이다.
글자 형태의 변천은 갑골문, 금문에서 발전하여 예서를 거쳐 이른바 해서로서 안정된 이후로는 서예사적 으로 보아도 진전되는 바가 없고 오히려 그 이전 시대의 양식이 한데 모여 동일 평면에 놓이게 된다. 즉 동시에 병렬하는 양식들로 변질된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서로 변이형이 되는 관계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중국 대륙에서 간체자가 일본에서 신자체가 각기 제정되는 과정에서도 초서체 자체가 해서체로 적극적으로 수용되었으며 같은 효과를 낳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관점이 앞서 살펴본 大西(2009a)와 같은 디자인적 관점의 서체 정의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서체 관념의 느슨함으로 인해 본래는 있을 수 없는 자체가 사용되는 것도 디자인적 관점에서 는 설명할 수 없다. 인쇄 서체의 성립에 따라 서체 관념이 크게 변화하고 말았고 더는 서법에 의해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오늘날 이시즈카 한자자체론의 서체 개념은 유효성의 한계가 분명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을 수 있는 자체의 범주를 추구함에 있어서 역사성을 포기한 디자인적 관점보다 유효하게 기능할 수 있음은 자명하다 할 것이다.
2. ‘서체’ 개념의 발전성
1) 한자에 있어서의 ‘서체’
이렇게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것은 한자의 역사적인 관점에서 서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紅林(2012)에서는 가나(仮名)를 한자 서체 중 하나로 볼 수 있지 않느냐는 문제 제기가 이루어졌 고 가나가 한자로부터 파생적으로 발전된 것임이 제시되었다. 그것 자체에 찬동하지는 못하더라도 한 자의 서체가 역시나 문자로서 일탈적인 부분을 내포하고 있음을 꼬집은 듯 보인다. 서법의 변화는 역 시 단순한 겉모습의 차이가 아니고 문자로서 갖는 성질을 바꾸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자에서 역사적 서체의 차이는 가타카나(片仮名)와 히라가나(平仮名)가 문자로서 서로 구분되는 만큼의 차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히라가나 위주의 표기가 확립되어 가타카나가 종속적으로 쓰이게 된 현대에는 가타카나와 히라가나의 차이도 그다지 느껴지지 않지만, 역사적으로 는 내용에 따라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명확히 구분해서 사용했었다(今西(2023) 등).
2) 일반문자론적인 ‘서체’
서체 개념은 다른 문자체계에서도 서법사적이고 범역사적인 두 측면을 갖는다.
가령 그리스 알파벳 계통(그리스 문자, 라틴 문자, 키릴 문자 등)에서 대소문자 구별이 고대 해서체 와 중세 초서체의 범역사적, 범서체적 혼합에 의해 생겨난 것은 유명하다. 이것은 중국 대륙의 간체자 와 일본의 신자체 제정이 해서와 초서를 조합하거나 배합함으로써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 냈다는 점에 서 현상적으로 어느 정도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永井(2010)에 제시된 것과 같이 고대 이집트 문자에서 성각문자와 신관문자, 민중문자는 서 체의 차이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별개의 문자로 취급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한자의 서체에서도 해서체와 초서체 사이에는 변별 방법이 다른 것이 많고35), 서체와 체계로서의 문자 사이의 차이에는 일반문자론적으로도 음미할 부분이 존재한다.
자체의 표준이 지역 및 시대별로 존재하는 것은 Smith (2020)의 화용론적 문헌학(pragmaphilology)을 통해 이해해 볼 수 있다. Smith (2020: 32)에서는 through의 표기가 중세 영어 시기에 500가지나 존재했다는 점을 언급하고 그것이 근대 영어 시기에 통일되는 이유에 대해서, 언어 습관 공동체(communities of practice)나 언행 공동체(discourse communities)가 달랐다는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서술한다. 이러한 공동체의 차이에는 서체 선택도 포함되며 위클리프 성경의 필사본에서 궁정적이거나 통속적인 서체가 아닌 성스러운 문헌을 필사하기에 적합한 서체가 선택되었다는 점을 예시로 들고 있다36). 본고의 서두 에피그래프에 인용한 바와 같이 문헌의 이면에는 문헌을 낳은 사회가 있는 것이며 이시즈카 한자자체론이 지역과 시대의 표준을 중시하는 의의도 그러한 측면에서 재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일례로서 가령 岡田(2021)의 제3, 5장에 기술된 ‘이로하 가나(いろは仮名)’가 문헌 고유의 대단히 고정된 자체가 사용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시즈카 한자자체론에서 일컫는 표준과는 비견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화용론적 문헌학의 관점에서 구체적인 이해의 단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히라가나의 자체가 일정하지 않았던 전근대 일본에서 초학자가 히라가나 서법을 배우기 위해 사용한 이로하우타 글씨본(いろは歌手本)에서 특정 자체만이 사용된다는 사실은 일찍이 알려져 있었으나, 岡田(2021)에서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여 자체의 범위를 명확히 하였다. 이 ‘이로하 가나’가 이시즈카 자체론에서 말하는 자체나 문헌의 표준과 다른 것은, 이시즈카 자체론에서 말하는 표준이 문화적으로 높은 수준의 것이라는 함의를 갖는 반면, 이로하 가나는 초학자를 위한 것이므로 그러한 문화적 함의는 없으며, 가나에서는 되려 여러 종류의 다양한 자체를 구사하는 것이 높은 수준 을 의미하기 때문에(紅林, 2012), 이로하 가나가 이로하우타 글씨본 이외의 문헌에서 자체의 표준으로 서 발현되는 일은 없었다는 점이다. 활자가 등장한 이후에 그러한 엄밀한 차이는 사라지게 되었지만 그것은 한자와 가나, 혹은 해서체와 초서체라는 두 서체에 부여된 의미를 언어습관으로서 공유하는 공동체가 사라진 것이라는 관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Ⅳ. 마치며
본고에서는 한자라는 계열에서 서체라는 개념을 어떻게 분석에 이용하면 좋을지를 이시즈카 하루 미치의 한자자체론을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이시즈카의 한자자체론은 서체를 글자를 아우르는 표준으 로서 상위에 둔다. 이것은 자료 연구의 장에서 탄생한 실지적인 것임을 학설의 발전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이시즈카가 말하는 서체는 실질적으로는 문자 체계로서의 차이에 가까운 측면이 있으 며, 오늘날 동일한 글자에 대한 서기 방식의 차이로 인식하는 것과는 이질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그러한 현대적 감각에 기인하는 오독 사례를 지적하였다. 그런 다음 역사적인 서체와 인쇄 서체를 구 별하여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점, 이시즈카 한자자체론을 화용론적 문헌학(pragmaphilology, Smith, 2020)의 방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음을 논하였다.